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2세 (문단 편집) === 어이없는 [[죽음]]과 사후 혼란 === [[1559년]] [[6월 30일]], 이 [[결혼]]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토너먼트 [[마상창시합]]이 있었는데 [[스코틀랜드]] 근위군 대장이었던 콩테 드 가브리엘 몽고메리[* 스코틀랜드 근위군 대장이라고는 해도 가브리엘 자신은 [[프랑스인]]이었다. [[백년전쟁]] 후기 [[잔 다르크]]가 출현하기 직전 위기에 몰려 있었던 도팽 [[샤를 7세|샤를]]을 구원하기 위해 당시 프랑스의 동맹이었던 [[스코틀랜드군]]이 파병되었는데, 스코틀랜드군 [[지휘관]]들의 말을 받아들여 샤를 7세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을 국왕 [[친위대]]로 삼았다. 이것이 스코틀랜드 근위군의 시초였다.]와의 창 시합에 직접 참가했다가[* 심지어 이 때 앙리 2세는 "내가 왕이라고 봐 줄 생각 말고, 제대로 해라"라고 했다.], 몽고메리 경의 창날이 부러져 [[투구]] 틈새로 파고 드는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오른쪽 눈 바로 위에 [[랜스(무기)|랜스]]의 파편이 박히고 말았다. 앙리 2세를 치료하기 위해 당대의 명의인 앙브루아즈 파레를 불러 사형수 6명으로 사전 시험을 벌이며 [[수술]]을 하기도 했고, 해부학의 선구자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까지 불러서 베살리우스가 파편을 제거하는데는 성공했지만, [[7월 10일]] 앙리 2세는 부상에 일어난 감염으로 두통에 시달리다 결국 고통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40세였다. 여담으로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앙리 2세가 죽기 전날 결혼했다. 앙리 2세는 만약 여동생의 결혼 전에 자신이 죽어버리면 사보이아 공국이 [[조약]]을 위반할지도 모른다고 여겨 죽어가는 와중에도 결혼식을 재촉했고, 결국 마르그리트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성대한 [[결혼식]] 대신 눈물바다가 된 생폴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러야만 했다. 이렇게 앙리 2세가 사고사한다는 것을 예언해 유명해진 사람이 바로 [[노스트라다무스]]였다. 물론, 그가 예언한 앙리 2세의 [[죽음]] 자체는 맞아떨어졌을지 몰라도 그의 예언에는 많은 오류가 있었다. 참고로 몽고메리 [[백작]]은 왕을 죽였지만 고의가 아니었기에, 앙리 2세가 특별히 사면령을 내리고 죽어 마창시합 자체로는 추궁을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왕을 죽였다는 전적으로 인해 전통적인 [[귀족]] 생활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프랑스 왕실로부터 푸대접을 받았으며 그래서 불만은 품은 몽고메리는 [[개신교]]로 개종한 이후, [[플랑드르]]로 도망갔다가 [[위그노 전쟁]] 중에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고향]]인 [[노르망디]]의 개신교 [[반란]]을 획책하기 위해 돌아왔다가 [[프랑스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후, 다시 프랑스에 돌아오게 되는 그의 먼 후손이 [[버나드 로 몽고메리]]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